관계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금관가야를 위시한 가야 제국이 언제부터 야마토왜와 정치적인 목적의 교섭을 갖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사적인 내용이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인다. 이 비문에 의하면 400년과 404년에 왜가 한반도에 침입하여 고구려와
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倭兵
광개토왕릉비문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및 왜의 군사적인 관계뿐 아니라 외교관계도 알 수 있는 자료가 제시되는데, 아래의 신묘년조의 기록은 그 해석에 있어 많은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 (1)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왜구⋅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이형구)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
관계를 구체화하고자 하였던 점에 있다고 하겠다.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은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 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에 있어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가 왜, 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세력권 내의 민족
해석의 유의점
임나일본부설의 주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 원사료 편찬 과정에서 상당한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Ⅱ. 임나일본부에 대한 주장
1.일본측 학설
①출선기관설(
관계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그 밖에 2개의 기사는 대략적으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2.광개토왕 사후 그에게 붙여진 시호(諡號)의 의미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생전에 ‘백잔’(백제를 의미함)을 비롯한 사방의 적
倭潰逃. 拔□城,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句. 請□□□朝貢.
백제가 영락 6년에 한 맹세를 어기고 왜와 和通하였는데, 영락 9년에 광개토왕이 순시차 평양성에 갔더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에 가득
왜왕이 요구한 7국의 관작에서 백제가 제외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송의 입장에서는 왜왕이 이미 사라진 진한․마한의 왕을 칭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라․가야의 왕을 칭하든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백제와는 이미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의 왕을 칭하는
광개토왕릉비는 높이는 6.39m이며, 무게로 따진다면 약 37t이나 된다. 능비의 모양을 보면 불규칙한 長方形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허리 부분은 약간 좁은 편이다. 그리고 이 비의 4면에 당시 유행하던 연서체로 1,775자 ( 동남 1면 11행 449자, 서남향 2면 10행 387자, 서북향 3면